1. 성분표가 "향료"에서 끝나는 이유
화장품 뒷면 성분표를 끝까지 읽어 본 적이 있으신가요. 낯선 화학명이 스무 개쯤 이어지다가 마지막에 "향료" 또는 "fragrance" 한 단어로 끝나는 제품이 많습니다. 그 한 단어 뒤에 몇 가지 물질이 들어 있는지는 성분표만 봐서는 알 수 없습니다.
이건 제조사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법이 그렇게 허용하고 있어서입니다. 미국의 경우 1973년 시행된 공정포장표시법(Fair Packaging and Labeling Act)이 화장품 성분을 라벨에 적도록 하면서 향료 성분만은 예외로 뒀습니다. 향 배합은 업계의 영업비밀로 인정한 것입니다. 향수 산업을 위해 만들어진 이 예외 조항을 그 뒤 스킨케어·바디워시·세제까지 폭넓게 쓰게 됐습니다.
그 결과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이 됩니다. 성분표에 없는 물질이 제품 안에 들어 있어도, 그것이 "향료"라는 범주에 속하면 라벨을 아무리 꼼꼼히 읽어도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 이야기할 물질이 정확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2. 향수에 프탈레이트를 왜 넣나
프탈레이트(phthalate)라는 이름은 대개 플라스틱을 무르게 만드는 가소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딱딱한 PVC를 부드럽게 만들어 장난감·바닥재·의료용 튜브에 쓰는 그 물질입니다. 그런데 향수에 들어가는 프탈레이트는 역할이 다릅니다.
향수에서 이 물질이 맡는 일은 향을 오래 붙잡아 두는 것입니다. 향 분자는 대개 가볍고 잘 날아갑니다. 뿌리자마자 증발해 버리면 향수가 아니라 방향제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향이 천천히 풀리도록 잡아 두는 물질을 섞는데, 이 역할을 하는 것 중 하나가 디에틸프탈레이트(DEP, diethyl phthalate)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분이 하나 생깁니다. 프탈레이트는 한 물질이 아니라 계열입니다. 분자가 큰 것(고분자량)과 작은 것(저분자량)이 있고, 쓰이는 곳도 다릅니다. 플라스틱을 무르게 하는 데는 분자가 큰 것이, 향을 붙잡아 두는 데는 분자가 작은 것이 쓰입니다. DEP는 저분자량 쪽에 속합니다.
이름이 비슷해서 자주 섞이는 것들
DEP(디에틸프탈레이트) — 저분자량. 화장품·향료의 향 고정.
DEHP(디에틸헥실프탈레이트) — 고분자량. PVC 가소제.
이름이 세 글자 차이지만 쓰이는 곳도, 몸에 들어오는 방식도 다릅니다. 뒤에서 이 둘이 갈립니다.
3. 규제되는 프탈레이트와 향료에 든 프탈레이트가 다르다
한국에도 화장품 프탈레이트 기준이 있습니다. 식약처의 「화장품 안전기준 등에 관한 규정」은 프탈레이트류를 총합 100마이크로그램/그램 이하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관리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대상으로 삼는 프탈레이트가 세 가지로 특정돼 있습니다. 디부틸프탈레이트(DBP), 부틸벤질프탈레이트(BBP), 디에틸헥실프탈레이트(DEHP). 이 셋의 합계가 100마이크로그램/그램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목록을 다시 보시면 DEP가 없습니다. 향료에 향 고정 목적으로 실제로 쓰이는 그 물질이, 화장품 프탈레이트 기준 세 종류에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입니다. "화장품 프탈레이트는 규제되고 있다"는 말과 "향수에 든 프탈레이트가 규제되고 있다"는 말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규제 목록에 있는 세 종류는 주로 플라스틱 가소제 쪽이고, 향료에 쓰이는 쪽은 그 목록 밖에 있습니다. 유럽연합도 완구·육아용품에서는 여러 프탈레이트를 금지했지만 화장품 향료 성분 공개는 별개의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4. 16명에게 3시간 노출시킨 실험
"그래서 향수를 뿌리면 그게 실제로 몸에 들어오나?" 이 질문에 직접 답한 실험이 있습니다. 자원자 16명(여성 9명, 남성 7명, 19~47세)을 대상으로 프탈레이트에 3시간 노출시키고 소변에 나오는 대사체를 잰 연구입니다.
노출 조건을 네 가지로 나눈 것이 이 연구의 핵심입니다. DEP를 흡입과 피부로 함께 노출시킨 조건, DEHP를 같은 방식으로 노출시킨 조건, 그리고 각각을 피부로만 노출시킨 조건. 공기로 들어오는 몫과 피부로 들어오는 몫을 갈라 보기 위한 설계입니다.
DEP를 흡입과 피부로 함께 노출했을 때, 소변으로 회수된 양은 흡입량 기준으로 계산하면 평균 84퍼센트였습니다. 최고 농도에 도달한 시각은 노출 시작 후 3.3시간, 반감기는 2.1시간이었습니다. 들어온 것이 대부분 빠져나갔고, 몇 시간 안에 처리됐다는 뜻입니다.
회수율 84%
DEP 흡입 노출량 기준으로 계산했을 때 소변에서 회수된 비율. 들어온 것이 대부분 대사되어 배출됐습니다.
최고 농도 3.3시간
노출 시작 후 소변 대사체 농도가 정점에 이른 시각. 피부만 노출한 조건에서는 4.6시간으로 더 늦었습니다.
반감기 2.1시간
몸에 쌓이는 물질이 아니라 빠르게 빠져나가는 물질이라는 뜻입니다. 다만 매일 노출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5. 같은 프탈레이트인데 하나는 피부를 못 넘었다
이 실험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피부만 노출한 조건의 결과였습니다.
DEP는 피부에만 닿았는데도 소변에서 대사체가 검출됐습니다. 최고 농도 도달 시각은 4.6시간, 반감기는 2.7시간이었습니다. 흡입이 섞였을 때보다 조금 늦고 조금 길지만, 분명히 피부를 통과해 몸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반면 DEHP를 피부에만 노출했을 때는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같은 프탈레이트 계열인데 한쪽은 피부를 넘어왔고 한쪽은 넘어오지 못한 것입니다.
차이를 만든 것은 분자의 크기로 설명됩니다. 피부 바깥층은 물질을 가려서 통과시키는데, 작고 가벼운 분자일수록 잘 지나갑니다. 향료에 쓰이는 DEP는 작은 쪽, PVC 가소제로 쓰이는 DEHP는 큰 쪽입니다. 향을 오래 붙잡아 두려고 고른 성질이, 동시에 피부를 잘 넘는 성질이기도 했던 셈입니다.
"들어온다"와 "해롭다"는 다른 말입니다
이 실험이 보인 것은 흡수와 배출의 경로이지 독성이 아닙니다. 물질이 몸에 들어왔다가 몇 시간 만에 빠져나간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는 위험하다는 뜻도 안전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판단은 다른 종류의 연구가 맡습니다.
6. 소변에서 가장 흔하게 나오는 대사체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프탈레이트 노출을 재는 방법은 소변 대사체 측정입니다. 미국의 국민건강영양조사(NHANES)를 비롯한 여러 생체 모니터링 연구에서 소변에 가장 흔하게 검출되는 프탈레이트 대사체 가운데 하나가 DEP의 대사산물인 모노에틸프탈레이트(MEP)입니다.
왜 이 물질이 가장 흔한지는 앞의 이야기와 이어집니다. DEP는 향료에 널리 쓰이고, 향료가 든 제품은 향수만이 아니라 로션·샴푸·바디워시·세제까지 폭넓게 걸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질은 피부를 넘어옵니다. 노출 경로가 많고 흡수도 되니 소변에서 자주 검출되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소변에서 검출된다는 사실은 노출됐다는 뜻이지 해를 입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체 모니터링은 "얼마나 노출되고 있나"를 재는 도구이지 "그래서 어떤 병이 생기나"를 재는 도구가 아닙니다.
7. 여기서 선을 긋습니다
프탈레이트가 호르몬 작용을 교란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연구가 프탈레이트를 내분비계 교란 물질로 분류하고, 에스트로겐·프로게스테론·안드로겐 계통에 영향을 줄 가능성을 보고했습니다. 소변 프탈레이트 대사체 농도와 성호르몬 수치, 체중, 허리둘레 같은 지표의 연관을 본 연구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연구들 대부분이 관찰연구입니다. 어떤 시점에 소변 농도를 재고, 같은 시점의 건강 지표와 통계적 연관을 본 것입니다. 연관이 보였다고 해서 그 물질이 그 결과를 일으켰다는 뜻은 아닙니다. 프탈레이트에 많이 노출되는 생활 방식이 다른 요인들과도 얽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방암과의 연관을 보고한 연구도 있지만, 이 역시 관찰연구이고 결과가 일관되지 않습니다. 어떤 연구는 연관을 보고했고 어떤 연구는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연관이 보고됐다"와 "원인으로 확인됐다"는 전혀 다른 명제입니다.
앞서 소개한 16명 실험의 저자들도 스스로 한계를 적어 뒀습니다. 참가자가 적어 나이와 성별의 영향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고, 일부 참가자는 대사체 수준이 검출 한계에 가까워 배출의 후반 단계를 관찰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확정된 것과 확정되지 않은 것
확정 — DEP는 피부만 닿아도 흡수되어 소변으로 배출된다(사람 대상 실험, 16명). DEHP는 같은 조건에서 검출되지 않았다. 한국 화장품 프탈레이트 기준 세 종류에 DEP는 포함되지 않는다.
확정되지 않음 — 일상적인 향료 노출 수준이 사람에게 어떤 질병을 얼마나 일으키는가. 관찰연구의 연관은 인과를 뜻하지 않는다.
8. 그래도 할 수 있는 것
모르는 것이 많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여기서 제안하는 것들은 "위험하니 끊으라"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알자"에 가깝습니다.
첫째, 노출 경로를 줄이는 쪽이 성분을 알아내는 쪽보다 현실적입니다. 성분표에 "향료"라고만 적힌 이상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대신 향이 강한 제품을 몇 개나 겹쳐 쓰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향수 하나가 아니라 로션·바디워시·섬유유연제·방향제가 모두 향료 제품인 경우가 많습니다.
둘째, 뿌리는 자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앞의 실험이 보인 것은 피부 흡수였습니다. 피부에 직접 닿는 양을 줄이고 싶다면 옷이나 소지품 쪽에 뿌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건강 이득으로 이어진다는 근거는 아직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노출을 줄이는 선택입니다.
셋째, 표시를 확인할 수 있는 제품도 있습니다. 일부 브랜드는 향료 성분을 자발적으로 공개하거나 프탈레이트 무첨가를 표기합니다. 법이 요구하지 않는 정보를 스스로 밝히는 쪽을 고르는 것도 소비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넷째, 임신 중이거나 영유아를 돌보는 경우에는 더 신중해도 좋습니다. 내분비계 교란 가능성이 제기된 물질은 발달 단계에서 영향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여러 기관의 공통된 신중론입니다. 확정된 위험이 아니라 사전예방 차원의 판단입니다.
겹쳐 쓰는 개수를 센다
향수 한 병이 아니라 향료가 든 제품 전체가 노출량을 만듭니다. 하루에 몇 개를 쓰는지부터 세어 봅니다.
피부 접촉을 줄인다
피부 흡수가 확인된 만큼, 닿는 면적을 줄이는 선택이 가능합니다. 건강 이득이 증명된 방법은 아닙니다.
공개하는 제품을 고른다
법이 요구하지 않아도 향료 성분을 밝히는 제품이 있습니다. 확인 가능한 쪽을 고르는 것도 방법입니다.
9. 자주 묻는 질문
향수를 쓰면 몸에 프탈레이트가 쌓이나요?
쌓인다기보다 들어왔다가 빠져나갑니다. 16명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DEP의 반감기는 흡입과 피부 노출을 합쳤을 때 2.1시간, 피부만 노출했을 때 2.7시간이었습니다. 몇 시간 안에 대사되어 소변으로 배출되는 물질입니다. 다만 매일 반복해서 노출되면 소변에서 계속 검출되는 상태가 됩니다.
한국 화장품은 프탈레이트가 규제되고 있지 않나요?
규제되고 있지만 대상이 세 종류로 특정돼 있습니다. 식약처 「화장품 안전기준 등에 관한 규정」은 디부틸프탈레이트·부틸벤질프탈레이트·디에틸헥실프탈레이트의 총합을 100마이크로그램/그램 이하로 제한합니다. 향료에 향 고정 목적으로 쓰이는 디에틸프탈레이트(DEP)는 이 세 종류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성분표에 "향료"만 적혀 있으면 프탈레이트가 들었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향료 성분은 영업비밀로 인정되어 개별 성분을 표시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라벨만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프탈레이트 무첨가를 따로 표기한 제품이라면 확인이 됩니다.
프탈레이트가 암을 일으키나요?
사람에서 확정된 인과관계는 없습니다. 소변 프탈레이트 대사체와 유방암의 연관을 보고한 관찰연구가 있지만 결과가 일관되지 않고, 관찰연구의 연관은 원인을 뜻하지 않습니다. 프탈레이트가 내분비계 교란 물질로 분류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과 "일상 노출이 암을 일으킨다"는 명제는 다릅니다.
DEP와 DEHP는 뭐가 다른가요?
둘 다 프탈레이트지만 분자 크기와 쓰임이 다릅니다. DEP는 저분자량으로 향료의 향 고정에 쓰이고, DEHP는 고분자량으로 PVC 가소제에 쓰입니다. 16명 실험에서 DEP는 피부만 노출해도 소변에서 검출됐지만 DEHP는 같은 조건에서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작은 분자가 피부를 더 잘 통과하기 때문으로 설명됩니다.
이 글에 대하여
저는 의료 전문가가 아닙니다. 가족의 투병을 겪으며 자료를 직접 찾아 읽는 습관이 생겼고, 이 글은 그렇게 실제로 읽은 출처를 정리한 것입니다.
확정된 것 — 사람 대상 실험에서 DEP가 피부 노출만으로 흡수되어 소변으로 배출됐다는 사실, 같은 조건에서 DEHP는 검출되지 않았다는 사실, 한국 화장품 프탈레이트 기준 세 종류에 DEP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
확정되지 않은 것 — 일상적 향료 노출이 사람에게 어떤 질병을 얼마나 일으키는지. 이 부분은 관찰연구의 연관 보고만 있고 인과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건강 상태나 복용 중인 약, 임신 여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개별 상황은 반드시 의료진과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10. 참고 자료
- Koch HM 외. Excretion of Urinary Metabolites of the Phthalate Esters DEP and DEHP in 16 Volunteers after Inhalation and Dermal Exposure. 자원자 16명 대상 3시간 노출 실험. 흡입·피부 병행 및 피부 단독 조건 비교.
- 식품의약품안전처. 「화장품 안전기준 등에 관한 규정」 — 프탈레이트류(디부틸프탈레이트·부틸벤질프탈레이트·디에틸헥실프탈레이트) 총합 100㎍/g 이하.
- 미국 공정포장표시법(Fair Packaging and Labeling Act, 1973) — 화장품 성분 표시 의무와 향료 성분 예외 조항.
- NHANES 기반 생체 모니터링 연구 — 소변 프탈레이트 대사체 측정. DEP 대사산물 MEP가 가장 흔하게 검출되는 대사체 중 하나.
- NHANES 2013–16 자료 기반 연구 — 소변 프탈레이트 대사체와 폐경 전후 여성의 혈청 성호르몬 연관 분석(관찰연구).